장애인 문화예술의 정치성, “실패하는 연습실, 삶을 살아보는 리허설, 세상을 바꾸는 투쟁”

<장애인 문화예술의 정치성, “실패하는 연습실, 삶을 살아보는 리허설, 세상을 바꾸는 투쟁”>

이진희(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해당 원고는  2018년 지난 3월 7일에 개최된 <평창 패럴림픽 국제 장애인권 컨퍼런스>에서 이진희 사무국장이 장애인 문화와 권리에 대해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이토록 정치적인, 장애인 문화예술 현장

장애여성 배우가 무대에 오른다. 발달장애인 합창단이 노래를 부른다.
어떤 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고, 다른 이는 새로운 몸의 등장에 열광하거나 감동하여 극찬한다. 누군가는 장애로 인해 기술연마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후 아무래도 아직까지 장애인의 노래와 연기는 전문성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한다. 기대 이상보다 잘하긴 하지만 전문적인 문화예술의 영역으로 보긴 어렵다고 아쉬워한다. 유명 장애인 예술가라는 누군가는 장애인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그냥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감상과 논평의 차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장애인 예술가와 관객 사이에선 정상과 비정상, 감동과 정치, 예술과 재활(또는 치료), 전문성에 대한 입장차이 등의 복잡한 소통이 오간다.

치료, 테라피, 사회통합, 교육, 극복, 취미, 여가, 직업교육… 마치 우산 개념처럼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은 많은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예술은 치유의 효과를 가지기도 하고, 사회통합과 같은 공익성을 띄기도 한다. 하지만 왜 유독 장애인 예술에 대해서는 치유의 기능을 더욱 강조하는 것인가. 왜 장애인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통합 이어야 하는가. 기존 사회에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만드는 사회구조를 반대하는 정치적인 행위여선 안 되는가. 설마 문화예술영역에서도 장애인을 치료와 재활의 대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접근이 장애인 문화예술은 이미 ‘장애’가 있다고 한계를 설정하여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은 아닌가. 과연 사회는 장애인의 문화예술을 읽고 해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장애인의 인권은 장애인의 문화예술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이 질문을 지나지 않고 장애인의 문화예술 활동의 사회적 의미와 한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 가능한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권의 눈높이는 장애인 문화예술, 장애인 예술가에 대한 해석과 평가와 무관하지 않다.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대단해요.’ 라는 말 이면에는‘장애=무능’이란 편견이 깔려 있다. 장애가 있지만 이만큼 했다 라는 관점은 장애극복 서사에 가깝다. 그래서 장애인 문화예술은 장애인이 살아가는 사회문화적 환경, 정치적 위치, 장애인의 몸과 경험이 던지는 독특한 표현양식과 주제의식을 통합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장애인이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세계, 장애인, 장애인 예술, 그것을 접하는 대중, 장애인이 창작한 작품, 작품이 담고 있는 주제의식이 독립적인 주제들이 아니란 말이다. 몸, 예술, 젠더와 섹슈얼리티, 노동, 활동보조, 발달장애, 교육권, 탈시설 등 인권 현실을 기반으로 통합적으로 장애인 문화예술을 접근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문화예술의 권리가 전혀 이야기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위 질문들을 충분히 전제한 토론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장애인차별에 맞서 싸우며 문화운동을 하는 이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의미, 예술적 독창성, 인권의 하나로써 장애인 문화를 이야기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는 이를 인정하고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이 글은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장애여성공감 소속 장애여성극단 춤추는 허리의 사례와 배우들과의 창작 작업과 인터뷰를 토대로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이 가지는 사회적 가치와 가능성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이 문화를 향유하고, 문화예술 작품을 생산(창작)하는 과정에서 독립성과 주체성을 확보하며 사회적 흐름과 장르로 장애인 문화예술이 인정받기 위해선 권리로써 접근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할 것이다.

1. 차별받는 몸, 장애재현과 해석의 정치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성” “원숭이 같은 여성“으로 프릭쇼(기형인간 쇼)에 출연하고, 사후에도 100년 이상 방부 처리된 시신이 순회 전시된 훌리아 파스트라나가 라는 여성이 있다. 해부학적으로 분해하고, 괴물로 묘사되며 사람들의 볼거리로 전시해 왔던 프릭쇼는 장애와 다른 몸에 대한 사회의 혐오와 차별, 문화적 타자화의 과정을 드러내주는 역사다. 이에 대해 로즈마리 갈런드 톰슨은 <보통이 아닌 몸>에서 “심한 선천적 장애인들의 몸은 언제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안, 확신, 환상을 배출하는 아이콘 기능을 해 왔고, 기형인간과 놀라운 인간들은 사회가 이들보다 더 평범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인간성을 결여한 오로지 몸뿐인 존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괴물’ monster를 의미하는 라틴어 monstra는 원래 ‘표시’를 의미하였으며, ‘보여 주다’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demonstrate의 어원을 형성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몸을 가진 사람을 사거나 팔며 구경거리로 만들었던 프릭쇼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럼 전시장과 무대에서 구경거리가 되었던 장애인은 이제 그 무대에서 내려왔을까? 여전히 기존 상업 미디어에 등장하는 장애인은 불행한 존재, 천사, 희화화의 대상, 천재, 범죄자 등 몇 가지 이미지로 재현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애인 당사자 배우가 역사극, 연애극, 모험극 등에 나타나 역동적인 삶의 주체로 나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극중 장애인 역할은 비장애인이 ‘잠정적으로’ 장애인이 되어 캐릭터를 연기한다. 대중들은 비장애인의 장애인이 연기는 불편하지 않지만, 장애인의 ‘연기’는 불편하게 느끼며, 장애로 인해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프릭쇼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편 장애여성과 장애남성의 섹슈얼리티는 다르게 묘사된다. 장애남성의 경우는 기존의 성규범을 수행하기 어려울지라도 적극적인 주체로서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거나 필요하다는 주장이 담겨진다. 영화 ‘섹스볼란티어’(2011)와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2013)에 등장하는 중증장애남성의 이야기가 그 한 예다. 영화는 장애가 있지만 성적권리가 있다고 강조하거나, 남성으로서 가지는 매력, 가능성, 성적 욕구 등 섹슈얼리티를 부각시키며 장애‘남성성’을 강조한다.

반면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수동적으로 그려지거나 성적대상, 성폭력의 대상에 머물게 둔다. 이것은 기존 사회가 이원젠더체계에 기반해 남녀 섹슈얼리티를 그리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애남성은 기존 남성질서의 진입을 열어두며 동등한 시민성을 강조하지만(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장애여성은 취약성을 강조하며 성적권리와 주체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장애재현에서 모든 장애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대상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장애에 대한 불안은 관계에서 만들어진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사회의 시작으로부터 배제되고 격리된 역사로 인해 필연적으로 내재된 불안과 조바심이다. 경험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감각이다. 장애인은 누구이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어떤 식의 고정된 이미지로 편견과 혐오를 강화하는데, 이는 장애재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정한 이데올로기 재생산 도구로서 장애재현을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다. 장애를 재현하는 공식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그러니 장애재현에 개입하는 정치적인 문제를 두고 장애로만 컨텐츠와 캐릭터를 분석하려고 할 때 한계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재현을 통해 바꾸어낼 수 있고, 다른 해석으로 사회적 차별을 짚어낼 수도 있다. 결국 장애 재현과 해석 모두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2. 보여지는 몸_장애여성의 예술하기, 예술가 되기

질병이나 장애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재현되지만 ‘보여주는’ 주체가 되긴 어렵다. 이야기는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경험을 드러내기 보다는 치료와 극복담론, 감동의 서사를 오가며 질병과 장애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공고히 한다. 푸코의 말처럼 몸은 사회적 통제가 직접 행해지는 장이 되는 것이다. 결국 아픈 사람은 정상성 신화, 의료와 사회복지 체계 안에서 타자화 된다. 건강한 몸을 이상화 시키고 반대편 자리에 질병과 장애를 위치시킨다. 질병과 아픔은 때론 임상과 의학전문서적에서 치료의 성과로 도구화된다. 장애를 치료하거나 완화하는 수술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하거나 실패했던 기억이지만 한편에서는 탁월한 치료법으로 소개된다. 의료화는 의학 안에 장애의 경험을 가두거나 몸의 불/가능성만으로 설명함으로써 다양한 몸의 경험을 지운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경험을 상상하기 어렵게 된다.



(춤추는 허리 정기공연, 거북이 라디오3, 2016)

장애여성은 몸의 차이로 인해 ‘비정상적’인 존재로 보여 지는 위치에 놓여 지곤 한다. 일상적으로 외출을 할 때면 사람들은 여전히 드러내놓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거리를 나설 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연말 불우이웃돕기 모금 방송은 장애를 가진 몸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몸에 대한 통제가 장애여성만이 경험하는 억압은 아니다. 자본의 이해에 따라 노동자의 신체는 그에 적합한 외향뿐 아니라 감정적 적격성도 갖춰야 한다. 건강하지 않은 몸, 질병이 있거나 손상된 몸, 나이든 몸, 여성/남성답지 못한 몸, 트랜스젠더의 몸, 뚱뚱한 몸… 모두 비정상적인 몸이다.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장애여성의 이야기는 타인에 의해서 규정되고 쓰여 졌다. 장애여성극단 춤추는 허리는 공연을 만들 때 늘 이점에 주목한다. ‘보여주는’ 주체가 되기 어렵고 ‘보여 지는’ 존재들이 겪는 삶의 경험을 ‘보여주고’ 거부하는 것이 중요한 공연 제작의 목표다.
늘 대리되거나 온전한 소통의 자유와 선택을 보장받기 어려운 언어장애가 있는 배우는 언어적 전달력을 가져야 하는 연극 공연에서 더욱 도전 받는다. 때론 의성어, 의태어, 단음절로만 감정과 이야기를 엮는 것을 시도했다.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장애인이 가지는 언어전달력의 한계를 언어(인간의 말)의 한계로 전복하여 고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장애여성극단 춤추는 허리의 연습실을 잠시 들여다보자.
말을 하고 소리를 내는 행동은 그러한 장애가 없는 사람에겐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에너지와 집중력을 덜 필요로 한다. 하지만 언어장애가 있는 뇌병변 장애여성의 경우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전후 동작과 긴장을 거쳐야 한다. 대부분의 뇌병변 장애여성은 오랜 세월 자신의 몸에 익숙해져서 어떤 타이밍과 방식으로 소리 내는 것이 자신에게 편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이런 행동이 무대에서 배우가 발성을 위해 훈련을 거듭하는 것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장애여성 배우는 연습과 소리내기의 방식이 그와 다를 뿐이다. 이점을 포착한다면 장애여성 배우들의 기술적 연마를 다른 각도로 해석할 수 있다. 장애여성의 예술하기는 이처럼 장애여성의 무대언어를 찾기 위한 과정으로 고통스럽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다. 또한 장애여성의 예술가 되기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이라고 여겨졌던 몸과 행위들에 대해서 반문하는 과정이다. 예술가라고 상상/인정되는 사람과 작품에서 지워진 장애가 있는 몸들의 존재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번엔 무대로 가보자. 무대라는 공간에서 배우는 여전히 정형화된 이미지와 몸을 강요당하는 측면이 크다. 공연을 할 수 있는 몸은 ‘정상적’인 신체를 상정하고 있으며, 관객 역시 그러한 배우를 상상하고 기대한다. 장애여성 배우의 경우 여성에게 강요되는 정형화된 몸의 기준을 벗어나 있다 라는 억압이 한층 더 복잡하게 작동된다. 설사 아름답고 튼튼한 몸에 대한 압박이 약화되더라도 민첩하게 움직이고 크게 소리를 내는 단련된 배우의 몸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은 지속된다. 따라서 무대 위에서 장애여성 배우는 복잡한 맥락 안에 놓인 자신의 몸을 경험하며, 넘어서야 하는 편견과 억압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가 기대하는 이미지를 거부하며, 장애와 권리를 이야기하는 움직임은 사회에 대한 저항이다. 이것이 바로 장애여성 예술인의 삶의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이야기가 쓰여 져야 하는 이유이며, 장애인 문화운동이 지향해야할 가치다.

3. 실패하는 연습실, 삶을 살아보는 리허설, 세상을 바꾸는 투쟁

새롭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생산하고, 장애인의 몸이 접근할 수 있는 연기양식과 무대연출 등을 재구성하는 문화생산의 주체로서 장애인 예술가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다른 몸이 위계화 되고,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며, 구경거리가 되는 사람을 만드는 권력구조는 소멸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 제도 안팎을 넘나드는 장애인 권리 투쟁이 유효하듯, 무대 위에서도 여전히 그들은 투쟁중이다. 무대 위에서 기꺼이 자신의 몸이 연기자가 되거나 오브제가 되기도 하며, 소통을 돕는 자막을 무대장치로 적극 활용한다. 또 비장애인다움을 흉내 내지 않고 장애와 비장애 역할을 넘나들며 장애인다운, 비장애인다운 몸과 이미지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적 도전의 과정들은 무대 안팎에서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실천이다.

“(공연 창작 워크숍을 하면서) 상황에 맞게 생각해 보라고 하고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고 그렇게 했었어요. 자기감정을 표현하는데 많이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예전하고 지금하고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해요. 재활원 선생님들은 내가 똑똑해 졌다고 하고.. 밖에 나가면 대부분 뭔가 왜 이러게 바뀌었냐고 해요. 옛날에는 말도 잘 못하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도 잘 못 걸로 그랬는데 지금은 내가 먼저 말을 하기도 하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러니까. 옛날하고 달라진 모습이에요.“
(장애여성극단 배우 A 인터뷰)


“아 이상하게 몸이 여기 와 있어. 약을 먹어서 너무 힘든데, 이상하게 몸이 여기 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장애여성극단 춤추는 허리 배우 B 인터뷰)

그저 취미나 아마추어 발표로 보이는 이 작업에 참여하는 것은 진지한 정치적 결단이다. 무대에 수년째 오르는 장애여성 배우 A는 자신의 삶이 변화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언어장애가 있어 의사소통이 대리되거나 장애인 거주시설의 통제를 경험했던 과거는 그가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어렵게 했다. 삶을 옮겨다 놓은 모형 같은 연습실과 무대는 실패를 연습하는 공간이 되어 주었다. 대사를 외우지 못하거나 동선을 틀리기도 하고 동료와의 관계는 어그러진다. 그러나 갈등을 빚고 긴 시간을 두고 함께 해결해 가는 과정이야 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적 관계이자,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다. 연습시간을 지켜야 하고 최대한 맡은 배역을 충실해야 한다. 보너스가 아니라,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시간이다.



(춤추는 허리의 연습실)

이른 바 사회화, 인간관계, 역할수행 이라는 것이 A의 삶에서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애차별적인 사회에서 장애인의 실패의 탓은 바로 장애로 돌려진다. 안전과 보호를 위해 실패와 사고가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 주변인들은 기회를 미리 차단하기도 한다. 그래서 연습실에서 제대로 된 연습이 이루어지는 날 보다 갈등하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자신의 욕구와 생각을 표현하고 충돌하는 시간은 의미 있다. 성공한 연습이 아니더라도 연습실로 몸을 옮기게 된다. 내가 원하는 관계와 일하는 방식, 내가 원하는, 나의 이야기를 담은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은 피로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다시 연습실을 찾는 동력이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완성을 향해 가는 실패의 연습실…
휠체어에서 내려와 내 몸의 일부라는 휠체어를 다시 바라보며 가벼운 자유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을까? 처음으로 다리의 보조기를 벗은 몸으로 춤을 추던 날에 그녀는 보조기를 처음 착용했던 날의 자신과 어떻게 만나고 있었을까? 서로 다른 속도와 높이로 걷는 모습을 서로 지켜보며 과연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있었을까? 진행되는 장애와 그로인해 앞으로도 계속 변할 내 몸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우리의 공연을 볼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 분명한 연습의 의미를 표현하기 어렵거나 몸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하거나 불가능한 순간에도 배우들은 몸을 움직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 헤매고 고민했다는 것이다. 연습실에서 반복했던 행위들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나의 움직임은 무엇인지 찾아나가던 시간이었으리라.

“처음과 끝이 정해져 있어서 그 장소와 공간, 시간 안에서만큼은 딱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죠. 그 안에서 만큼은 내가 너무 명확해져요. 내가 계획한 나로 살 수 있죠.”
(김미진 인터뷰)

자신의 기획대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경험, 삶을 살아보는 경험이다. 무대에서 처음과 끝의 주도권은 온전히 내 것이다. 거리의 시선, 텅 빈 지갑, 교육받지 못했다는 소외감, 아침이 와도 갈 곳이 없었던 하루. 창작과정에서 매일의 반복되었던 하루를 말하는 것은 특별하다. 말하기를 통해 개인적 경험이 사회적인 것임을 발견하고, 분노한다. 이것은 공연을 만들기 위한 과정일 뿐 아니라, 사회가 제한하는 정상적인 몸의 가치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기도 한 것이다. 나의 모든 경험이 연극이 되지 않지만, 다른 이의 경험에서 내 이야기를 본다.

춤추는 허리는 실전에 강하다. 나는 공통된 몸의 경험과 인식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무대라는 실전은 현실세계의 축소판으로 공연이 시작될 때 배우들은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영역의 주변인으로만 머물던 장애여성이 연극 생산의 주체가 되려고 하는 과정은 정상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도전이며, 변화를 위한 운동이다. 본무대는 리허설이며, 삶은 실전이다. 실전의 무대는 언제나 투쟁의 일상이다. 무대 안에서 느낀 자유로움은 무대 밖 삶과 이어지며 치열함을 위한 힘을 준다. ‘비정상적인 몸’이라는 규정을 벗어난 무대 위, 장애여성배우들의 몸은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타인에 의해서 규정되고 쓰여 지는 것이 아니라 장애여성으로써 삶의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이야기를 써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무대에 서는 이유다.

4. 장애인 문화, 결국 인권의 문제다.

“사회적으로 장애인 당사자는 챙김을 받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먼저 챙기고 살피고 다가가는 것 또한 우리에게 훈련이 필요하였고 공적인 언어선택을 하는 것도 서로의 노력을 필요로 하였다. 언어장애 특성상 못 알아들었을까봐 같은 얘기를 강한 어투로 말을 하거나 반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계속 얘기하기도 한다. 이럴 땐 서로 힘들어지기도 하고 무슨 얘기를 전달하려는 건지 모를 때가 생겨나기도 했었다. 이것도 소통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우린 함께 소통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려고 이야기를 나눈다. 왜냐하면 장애여성이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이다. (아마도 이건) 썩은 복지 때문일까…”
(장애여성극단 춤추는 허리 장애여성 배우 C의 글)

결핍과 무능, 돌봄이 필요한 의존적 존재라고 장애인을 생각하는 나라에서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협소하고 강제된 선택에 몸을 맞추어 살아갔던 장애여성 배우들에게 차별의 경험은 익숙하다. 반면에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 주장하거나 토론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극단에서 연출을 담당하는 C는 이것은 공연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이런 특징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설명하고 있다. 때론 이 특징들이 한계가 되기도 하고 앞서 강조한 것처럼 역설적으로 전혀 다른 방식의 배우로서 관계 맺기와 창작할 수 있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썩은 복지’ 인가라는 자조 섞인 말은 장애인을 주체적인 시민으로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공연을 만들어 내는 과정의 갈등이 ‘왜 우리는 이것밖에 못하나’가 아니라 ‘우리는 왜 이제야 실패의 경험을 하고 있나’라고 질문을 바꾸는 것이다. 왜 최고로 잘하지 못하나가 아니라, 왜 이제야 이런 경험을 시작하는가 라는 질문은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던 시간에 대한 문제제기다.

배우들 대부분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수급자들이다. 스스로 장애여성 예술가라고 자부하지만 공연수익은 턱없이 적고 장애인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정은 낮다. 매월 100만원 안팎의 정보보조금으로 생계를 잇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삶을 산다. 노동할 수 없기 때문에 월 100만원은 가치가 큰 돈 이지만 존엄함과 맞바꿀 수 있는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지원금f 위해 장애여성 배우들은 존엄함을 잠시 포기한다.

“사회 인식이 그렇잖아요. 그 사람들을 개별적인 상황을 보는 게 아니라 장애인이면 나라에서 당연히 복지정책으로 살려내는 사람들이란 이미지가 있으니까. 내가 세금을 직접 내는 게 많진 않지만. 모두가 살 때마다 10%씩은 내고 있는데. 그걸 의식하면서 살아야 당당 할 텐데, 내가 체감적으로 (세금 많이 낸다고)느껴지는 건 없으니까. 받기만 하는 이미지로 지속되니까. 자존심이 상하죠. 내가 생산적인 일을 해서 돈을 벌진 못하지만, 내가 무능한 것 같진 않은데, 그건 인정받지 못하고, 지금 수급자라는 것만 이야기되니까. 나뿐만 친구와 가족들 모두가 수급자라는 것을 중심으로 설명하면 정말 이상하죠.

(장애여성극단 춤추는 허리 배우 D인터뷰)

사회복지 체계 안에서도 생계부양자 모델로서 장애인은 애초에 상상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를 부양하거나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라 일방적 돌봄의 존재가 된다는 정책의 발상은 잘못됐다. 이런 발상은 많은 제도들이 구축되어도 동등한 시민권을 가진 존재로,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소수자를 ‘복지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는 현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애여성 단원들은 서로를 돌보고, 지지하며,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부담한다. 이것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머리와 몸을 움직여 일하고 생산하는 노동의 과정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장애인의 문화예술적 행위들은 치료, 사회통합이라는 답답한 틀에 갇혀 있기 때문에 노동으로서의 제 가치도 인정받지도 못한다. 물론 이것은 한국사회 비장애인 예술가의 낮은 권리와 처우와도 연동되는 문제다. 그렇다면 비장애인 예술가의 권리가 증진되면 장애인 예술가의 처우도 달라질까? 예술의 인간 자유의 지평을 넓히는 행위라고 해도 장애인의 예술을 그러한 활동이 하나로 사회가 인정할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장애인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 변화하지 않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5. 프로다움, 전문가 주의를 넘어서는 장애인문화운동

쉬운 창작은 없다. 공연 창작 과정은 사회가 제한하는 정상적인 몸의 가치를 거부하는 시간이다. 타인에 의해 규정되고, 보여 지는
‘대상’인 장애여성 감동스토리를 비판하며 배우들이 무대에 서는 이유다. 열심히 연습하지만 한 치의 오차 없는 휠체어 동선과 연기를 위한 기술 연마에 집중하진 않는다. 무대 밖의 시간을 무대 안으로 가져오기 위해서 장애와 젠더가 교차하는 삶의 경험들을 쏟아내려고 더 많이 애쓴다. 그리고 특별한 경험이 ‘특별함’에 머물지 않고, 동정이 아닌 연대의 공명으로 울리길 바라며 한 장면이 만들어진다. 아마추어 같은 이 모습이야말로 프로 이야기꾼이 되기 위한 필수코스다. 연습시간은 길고도 짧다. 천천히 빠르게 하자는 독촉은 실은 기다림의 다른 말이다.



(춤추는 허리 정기공연, 불만폭주 라디오, 2017)

처음으로 춤추는 허리가 공연을 올릴 준비를 할 때 무대공연에 적합하지 않거나, 한계가 있을 것이라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비장애인의 연극을 흉내 낼 것이라는 오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흉내 내기 자체가 쉽지 않았음은 물론 무의미 했다. (모든 흉내 내기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대에 서기 위한 과정에서부터 이 사회에서 우리의 몸이 가지는 한계와 제한을 경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연을 만들어 내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적합한 방법은 어디에도 없음을 깨달았다. 장애인 문화예술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장애인의 욕구에 맞는 제도적 지원이 전무한 상태, 언어장애가 있는 경우 의사소통의 문제, 종횡무진 움직이며 상황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극장의 물리적 구조, 장애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장애와 속도에 맞는 새로운 방식을 찾으며 스스로가 전문가가 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것은 공연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안에서 우리의 존재가 지워져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존의 연극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맞는 몸짓과 대사 전달 방식을 찾아야 했다. 배우의 역할을 넘어서 연출, 기획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경험하고 깨져야 했다.
앞서 예를 들었던 언어장애가 있는 장애여성 배우를 다시 기억하자. 장애여성 배우의 연기를 미학적, 정치적으로 새롭게 읽으려면 좋은 발성의 기준이 달라져야 한다. 장애여성 배우의 좋은 발성은 비장애인 배우처럼 기량을 닦는 것이 아니라 언어장애를 통해 터득한 독특한 감각과 자기 발성을 그와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주제의식에 담아내는 것이다. 이때 장애인의 문화예술은 흉내 내기가 아니라 인간의 몸이 보여줄 수 있는 예술적 행위의 기준과 한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인 문화예술의 전문성은 이러한 정치성을 견지하며 정상적 규범에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재정의 되어야 한다. 얼마나 더 기량이 좋은가의 문제는 비장애인 중심의 세계에 통합되기 위한 방식으로 유효할 수 있다. 하지만 기량이 좋고 나쁨의 기준이 정상규범에 기대고 있지 않은가? 전문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예술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인가? 장애인 예술이 과연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를 물을 때 전문성과 테크닉이 장애인 문화예술을 설명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한국사회 장애인 문화예술정책이 변화를 가지려면 장애인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담론의 변화가 기반 되어야 한다. 장애인 문화예술이야 말로 가장 정치적일 수 있는 투쟁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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